옥산 장씨(玉山張氏) 문중의 인물인 신와(愼窩) 장정옥(張廷玉)과 그의 후손 치재(癡齋) 장기표(張基杓)를 중심으로 한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들과의 교류와 문중 기록을 담고 있다. 송홍래(회천), 이기형, 이기윤 등 당대 독립운동가들과 장기표 중심의 교류를 보여주는 기문, 상량문, 명(銘) 등이 있으며, 장기표가 이우당(二友堂)에서 고종했을 때의 제문, 옥산 장공의 부고장, 독립운동가 송홍래·이기형 등의 만장과 만사가 포함되어 있다.
○ 신와(愼窩) 장정옥(張廷玉) 관련 3종
(1)을해년 신와공실기(愼窩公實記) 필사본 1책
(2)신미년 독립운동가 성산 이기형(李基馨)이 지은 신와(愼窩) 옥산(玉山) 장공(張公) 묘갈명
(3)무술년 성주 도은환(都殷煥) 신와선생 장공행장(愼窩先生張公行狀)
신와(愼窩) 장정옥(張挺玉, 1626~1698)
선생의 이름(휘)은 정옥(廷玉)이고, 자(字)는 득인(得仁)이며, 호(號)는 신와(愼窩)이고, 성은 장(張)씨이며, 본관은 옥산(玉山)이다. 아버지는 이름이 이유(以俞)이고 호는 지분헌(知分軒)이니, 한강(寒岡 정구)과 여헌(旅軒 장현광) 두 선생의 문하에서 학업을 받았고, 이양서원에 배향되었다. 생의 후손 기표(基杓)가 행장(狀)을 받들고 와서 나에게 비명(銘)을 지어달라고 청하였다. 상자 속에서 얻은 원고를 오직 살펴보니, 그 학문이 넓고 넓으며 강인하고 바르고 순수하며, 문장과 말은 그 뜻에서 발현된 것이었다. 평생에 걸쳐 공부를 지어 나간 것은 하늘과 사람, 그리고 인간 본성(성명)의 근원을 탐구하는 데 있었다. 학문에 침잠하여 단정하고 성실하였으며, 함부로 말하거나 웃지 않았다. 거친 옷을 입고 소박한 음식을 먹으며 구산(龜山)에 깃들었고, 맑고 깊은 샘과 밝은 달빛 같은 청빈함 속에 은거하였다. 스스로 욕심을 끊고 마땅한 데서 머물렀으니, 맑은 덕과 무거운 명망은 세상 사람들이 추앙하는 바가 되었다. 후손으로는 장면 총리가 있다.
○ 융희원년 치재(癡齋) 장기표(張基杓,1877~?) 행장 필사본 1책
단군기원 4210년 11월 14일 자시(子時)에 성주(星州) 벽진면(碧珍面) 가곡리(家谷里)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가문이 매우 청한(淸寒)하여 하루 세 끼를 미음이나 죽으로 이어갔으나, 가난에 개의치 않고 편안하게 도를 즐겼다(安貧樂道). 태몽의 신이함을 얻고 태어나, 5~6세 때부터 천재성을 보인 인물이다. 그는 재주보다 '부지런함(勤)'과 '허물을 고치는 태도(知過必改)'를 학문의 근본으로 삼았으며, 당대 영남의 이름난 유학자들로부터 학문적 깊이와 꼿꼿한 선비 정신을 크게 인정받은 인물이다.
○ 장씨 문중 족보 등 기타 총 5책, 1장
(1)장씨족보 필사본 1책
(2)장씨 가승 1장,
(3)신와공파종안(愼窩公派 宗案) 필사본
(4)경상도 도내 유현록(道內儒賢錄) 필사본 9장
안동, 예안, 대구, 영천, 선산, 밀양, 합천, 초계, 상주, 성주, 등 권말 일부 결실
(5)을사년 애감록(哀感錄) 필사본
(6)한문 연습 필사본
○ 독립 운동가 송홍래(宋鴻來), 이기형(李基馨) 등 기문류 관련 총 20점
(1)기묘년 회천(晦川) 송홍래(宋鴻來) 및 정종호(鄭宗鎬) 등 치재(癡齋) 장기표(張基杓)의 이우당기(二友堂記) 등 4점, 성주 북쪽 30리 소재 소산재기(韶山齋記)
(2)무인년 독립운동가 이기형(李基馨) 이우당(二友堂) 상량문
(3)무인년 독립운동가 이기형(李基馨), 정종호(鄭宗鎬) 독신재(獨愼齋) 상량문 2점
(4)신미년 독립운동가 이기형(李基馨) 독수재기(獨修齋記)
(5)경진년 유학자 이정기(李貞基) 이우정기(二友亭記) 및 회천(晦川) 송홍래(宋鴻來) 집에 보낸 이우정(二友亭) 간찰 봉투 2점
(6)독립운동가 송홍래(宋鴻來) 독수실명(獨修室名)
(7)독립운동가 이기형(李基馨) 하담(荷潭) 옥산(玉山) 장공(張公) 묘갈명
(8) 무술년 독립운동가 이기윤(李基允) 독신재명(獨愼齋銘)
(9)환성실명(喚惺室名)
(10)장기표(張基杓)의 하담정기(荷潭亭記) 2점
(11)영귀당기(詠歸堂記)
(12)장씨 문중 독신재 계안(篤愼齋禊案)
(13)성주 서쪽 십리에 위치한 신암선생(愼巖先生) 묘소기
○ 제문류 관련 기록 1책 14점
(1)치재(癡齋) 장기표(張基杓) 여의동 이우당(二友堂)에서 고종한 제문 등 11점
(2)청주 정중상(鄭中祥) 제문, 취재(翠齋) 제문, 등 70장 1책
(3)무부(武夫) 이경구(李景九)가 지은 한글 토가 있는 경모재(慶慕齋) 정주찬(鄭柱瓚) 행답
(4)홀기 1점,
(5)장씨 계묘년 추모계안
○ 부고, 만사, 만장 관련 60점
(1)독수재(獨修齋) 처사(處士) 옥산(玉山) 장공(張公),사돈 정씨 등 부고장 4점,
(2)독립운동가 이기윤(李基允) 추만
(3)이정기(李貞基) 추만 등 5점
(4)독립운동가 송홍래(宋鴻來) 만장
(5)독립운동가 이기형(李基馨) 만장
(6)치재공(癡齋公)을 위한 만사
(7)족질(族姪) 은석(殷錫)등 만장 20점
(8)진양 하명호(河明鎬) 등 만장 17점
(9)기타
성주 이규형 만장, 서원 정주화, 정명화 정순화, 만장 3점, 영양 최두곤, 최봉곤 만장 2점, 곽동수 만장, 평양 박종섭 만장, 장진해(張鎭海) 부고 알림, 장진호 송준필 찬 만사, 삼강계 정대열 만장 등 3점,
○ 혼인 관련 총 5점
(1)연길 1점,
(2)경산 이씨, 장진구 등 혼서지 4점
○ 글씨, 한시 및 간찰 등 총 17점
(1)글씨 이우당(二友堂), 삼호정(三湖亭) 2점
(2)짧은 문서 독립운동가 송홍래(宋鴻來) 보낸 답장, 이준화 답장, 치재(癡齋) 장기표(張基杓) 한시 등 6점
(3)사제 정인표 간찰 등 6점
(4)정주찬(鄭柱瓚) 간찰 필사, 무부(武夫) 이경구(李景九) 명언에게 보낸 한글 한문 겸용 간찰
(4)독립운동가 회천(晦川) 송홍래(宋鴻來) 등 한시 시축
○ 기타
(1)도조기 및 시제시 제사상 물목 등 아주 짧은 문서 20점
(2)옥계사 선양회 통문 및 양호재사 건축 비용 2점
(3)회연서원(檜淵書院) 망장(望狀)
(4)단산 서당 만장
○ 송홍래(宋鴻來)
1866년(고종 3) 5월 19일∼1953년 2월 7일.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 본적은 경상북도 성주(星州)이다.
1919년 3월 유림 대표 김창숙(金昌淑) 등의 주도로 작성된 독립청원서를 파리강화회의에 보내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기 위해 서명한 파리장서사건(巴里長書事件) 때 영남유림 137명 대표 중 한 사람으로 서명에 동참하였다.
당시 유림은 김창숙을 상해를 거쳐 파리로 파견하려 하였으나, 김창숙이 직접 가지 못하고 파리에 파견된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 대표 김규식(金奎植)에게 독립청원서를 송달했으며, 국내 각지의 향교에도 우편으로 발송하였는데, 당시 1919년 4월 12일 독립청원서에 서명한 송회근(宋晦根)이 경상북도 상주(尙州)에서 일어난 만세운동 관련자로 체포되면서 발각되었다.
이때 함께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919년 7월 29일 대구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기 전까지 옥고를 치렀다.
1995년 정부로부터 공훈을 인정받아 건국포장에 추서되었다.
○ 이기형(李基馨)
1875년(고종 12)∼1946년 1월 24일.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유학자. 자는 맹원(孟遠)이고, 호는 성와(惺窩)이다. 본관은 성산(星山)이고, 본적은 경상북도 성주군(星州郡) 월항면(月恒面)이다.
부친은 취오(聚五) 이규희(李奎熙)이다. 1919년 개최된 파리강화회의에서 한국독립을 호소하기 위해, 김창숙(金昌淑)이 작성한 파리장서 독립청원서에 유림(儒林)의 한 사람으로 서명하였다.
1919년 3월 1일 독립운동이 발발하자, 김창숙‧송홍래(宋鴻來)‧성대식(成大湜)‧송준필(宋俊弼)‧장석영(張奭泳) 등과 함께 독립청원운동을 전개하고,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하려다가 체포되었다. 체포와 함께 파리장서 독립청원서에 서명한 사실까지 탄로가 나서, 그해 7월 29일에 대구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판결을 받고,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 이기윤(李基允)
1891년(고종 28)∼1971년. 일제 강점기 항일운동가‧서예가. 자는 집중(執中)이고, 호는 극암(克菴)이다. 본관은 성산(星山)이며, 출신지는 경상북도 성주군(星州郡)이다.
부친은 이익희(李益熙)이다. 장석영(張錫英)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16세에 성균관 박사가 되어 경사(經史)와 제자백가서(諸子百家書)를 탐독하였다. 또 서법(書法)에도 조예가 깊어 명성이 있었는데, 청천서당(晴川書堂)‧회연서당(檜淵書堂)의 편액을 직접 썼으며, 당호(堂號)‧누정(樓亭)‧헌각(軒閣) 등에 많은 글씨를 남겼다. 1919년 장석영이 파리 만국평화회의에 보낼 파리장서의 문안을 작성할 때 초안 작성과 필역(畢役)에 직접 참여하여 스승의 항일투쟁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또 전국의 유림을 규합하여 파리장서에 서명활동을 펼쳤으나, 70세 노모를 봉양하고 있던 처지를 안타깝게 여긴 장석영의 만류로 서명에 참여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직접적인 연루자로 지목되어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향년 8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 정종호(鄭宗鎬)
1875년(고종 12)∼1954년. 일제 강점기 유학자. 자는 한조(漢朝)이고, 호는 뇌헌(磊軒)이다. 본관은 청주(淸州)이다.
부친 정재설(鄭在卨)과 모친 재령이씨(載寧李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인은 노상익(盧相益)의 딸 광주노씨(光州盧氏)이다.
어렸을 때는 중부(仲父) 정재기(鄭在夔)에게, 결혼 후에는 노상익‧노상직(盧相稷)에게 학문을 배웠다. 파리장서 사건 때 본문(本文)을 칠곡군에 있는 장석영(張錫英)으로부터 받아서 대구의 윤상태(尹相泰)에게 전하였다. 이 일로 체포되어 6개월간 투옥되었다. 이후산중에 은거하며 학문에 전념함과 동시에 많은 제자들을 양성하였다.
성리학에 조예가 깊어「이기변(理氣辨)」‧「대학정심장존양성찰변(大學正心章存養省察辨)」‧「격몽소편(擊蒙小編)」 등 많은 저작을 남겼으며, 유고로 『뇌헌문집(磊軒文集)』이 있다.
○ 이정기(李貞基)
1872년(고종 9)∼1945년. 일제 강점기 성리학자. 자는 견가(見可)이고, 호는 제서(濟西)이다. 본관은 벽진(碧珍)이고, 본적은 경상북도 성주군(星州郡)이다.
이총언(李悤言)의 후예이며, 부친은 이원하(李元河)이다.
장복추(張福樞)‧김흥락(金興洛)의 문하에서 수학하며, 퇴계(退溪)의 학문의 전통을 이어받아 도학(道學)으로 이름을 날렸다.
1905년(광무 9) 을사조약에 대한 소식을 듣고, 일본의 침략을 배척하는 [양이설 攘夷說]을 저술하여 영남유림의 경각심을 고취시켰다. 이후 성주에서 강학을 하며, 후학 양성에 매진하였다.
그의 사후에 유림들은 제강서당(濟岡書堂)을 창건하여, 그를 추모하며 학문에 매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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