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는 말
점령과 수복의 소용돌이, 그리고 벼랑 끝의 민초들
1950년 한국전쟁은 한반도 전역을 이념의 전장으로 몰아넣었지만, 가장 참혹한 비극은 거대한 전선(戰線)의 후방, 마을과 마을 사이에서 일어났다. 1950년 7월 중순 전라북도 익산(이리, 황등, 함라, 춘포 일대)이 북한 인민군에 점령된 후 약 석 달 동안, 평범한 민초들은 총칼을 앞세운 점령당국의 체제재편에 속수무책으로 노출되었다. 농민위원회, 부락자위대, 민주청년동맹(민청) 등의 외피를 쓴 조직들은 하루아침에 촌부들의 목줄을 죄었고, 생계를 이어가던 농민들은 영문도 모른 채 말단 심부름과 식량거출, 야간경계에 동원되었다.
그러나 1950년 9월 28일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되고 국군과 유엔군이 진주하면서 상황은 급반전했다. 패주하는 인민군이 지나간 자리에는 서슬 퍼런 수복 정국과 '부역자 색출'이라는 공포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점령치하에서 살기 위해 움직였던 모든 행위가 한순간에 '반역'과 '이적'의 혐의로 둔갑할 수 있는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이번에 발굴된 전북 익산지역의 자수서(15점), 보증서(3점), 진정서(2점), 탄원서(1점), 여행증명원(4점) 등 총 25점의 문서는, 바로 이 극한의 혼돈기(1950년 10월~1951년 2월)에 평범한 사람들이 자신의 생명을 증명하고 죄를 벗기 위해 치안대와 경찰서에 바친 가장 절박한 육필(肉筆) 기록이다.
2. 본론
실물 문서로 들여다본 역사의 맨얼굴
① 자수서
“살기 위해 적의 옷을 입어야 했던” 모순과 한(恨)
자수서 15점의 행간에는 배움이 짧은 촌부들이 느꼈던 원초적 공포와, 전쟁이 만들어낸 기막힌 모순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가장 상징적인 비극은 평남 강서군 출신 월남민인 [김근식(金根植)]의 자수서(1950.10.29)에서 목도된다. 그는 공산주의가 싫어 38선을 넘어 남하했고, 이리에 정착하여 대한청년단원으로 활동하던 우익청년이었다. 그러나 인민군 점령 치하에서 리위원회(里委員會)가 월남자를 색출하여 조사하기 시작하자, 처형의 공포 앞에서 그가 택한 유일한 생존책은 역설적이게도 '의용군 지원'이었다. 그는 자수서에서 “생활에 너무 곤란하고 생명을 보전하기 위하여 할 수 없이 의용군에 지원하였던 것이지 결코 본심이 아니었습니다. 고향의 부모형제를 떠나온 제가 왜 괴뢰군을 지지하겠습니까”라며 피눈물 나는 절규를 남겼다. 공산 치하를 탈출했던 이가 살기 위해 다시 공산군의 총을 잡아야 했던 이 기막힌 아이러니는 분단전쟁이 민초에게 가한 가장 잔인한 폭력이었다.
또 다른 자수자인 황등면 동연리의 문병오(文炳五)는 “본인은 무학(無學)으로 아무것도 모르고 마을 사람들의 권유로 농림위원에 선출되어 2달간 협력하였을 뿐”이라며, 양곡수매 같은 단순 부역조차 배움 없는 농민의 무지와 강압에서 비롯되었음을 처절하게 고백했다.
② 보증서
“우리가 목숨을 걸고 보증하오니” - 3인 연대의 구명
당시의 치안질서는 자수서 한 장으로 끝나지 않았다. 자수자의 진술이 거짓이 아님을 증명하고 향후 불순 행위를 하지 않겠다는 담보로서 반드시 ‘마을 보증인 3인’의 연대 서약을 요구했다.
함라면 신목리의 [김교남(金敎南)과 김정옥(金正玉)에 대한 보증서](1951.2.17)는 이 엄혹한 연좌 시스템의 실상을 그대로 보여준다. 신목리 주민인 김용운(金龍雲), 김만민(金漫珉), 김대성(金大成) 세 사람은 피보증인들이 인민군 침입 후 사태에 휩쓸려 역행위(逆行爲)를 범했음을 인정하면서도, “금후 우자(자수자)에 대한 일체의 행위는 본인 등이 책임을 지고 보증하겠음”이라며 자신의 도장과 지장을 찍었다. 보증인이 된 세 사람 역시 만약 피보증인이 다시 불순분자로 낙인찍힐 경우 처벌을 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이웃의 목숨을 건지기 위해 기꺼이 연대 책임을 떠안았던 이 서명들은, 서슬 퍼런 공권력 아래서 이웃들이 만들어낸 눈물겨운 생존의 방파제였다.
③ 진정서와 탄원서
마을 공동체의 집단적 호소
개인의 자수와 보증을 넘어, 억울하게 수감되거나 조사를 받는 이웃을 위해 작성된 [조용희(趙鎔熙)의 진정서와 주민 연명 탄원서]는 향촌사회의 온정을 웅변한다. 조용희의 진정서에서는 그가 “천성이 온순하고 평생 흙만 파먹고 살던 농민”임을 누누이 강조하며 사상적 불순성이 없음을 변호하고 있다. 함께 첨부된 연명 탄원서에는 동네 유지부터 이웃 농민까지 10여 명의 붉은 인장과 손도장이 빽빽하게 찍혀 있다. 마을의 한 식구를 사지(死地)에서 구해내기 위해 온 동네가 나서서 “이 사람은 죄가 없다”고 탄원한 이 문서는 이념의 광풍 속에서도 쉬이 끊어지지 않았던 향촌 공동체의 결속력을 증명한다.
④ 여행증명원
통제선에 묶인 가족의 슬픔
수복이 되었다고 해서 자유가 찾아온 것은 아니었다. 패잔병 토벌과 계엄통제로 인해 군·면 단위의 이동은 엄격히 차단되었다. 이리 평화동에 살던 상인 [장기열(張基烈)의 여행증명원](1950.11.2)은 이 비극의 또 다른 단면이다. 그는 전라도 광주까지 15일간의 왕복 통행을 허가해 달라고 청원하며 그 이유를 “처가(妻家) 친부모님의 소식을 탐문하기 위함”이라고 적었다. 전쟁의 화마 속에서 처가 어른들의 생사조차 알 길 없어 애를 태우다 관할 당국에 읍소하여 통행증을 발급받아야 했던 전시 민초들의 고단한 일상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3. 맺음말
엄격함의 굴레를 넘어선 ‘우파의 관용’과 화해의 교훈
이번에 공개된 25점의 문서를 관통하는 가장 본질적인 질문은 “그 엄혹했던 수복 정국에서 이들은 어떻게 살아남았는가?”이다.
흔히 해방정국과 한국전쟁을 다룰 때, 좌우의 이념적 대립만을 극단적으로 부각하곤 한다. 그러나 이 문서들이 남겨진 수복 직후의 행정절차를 냉정하게 복기해 보면, 매우 의미심장한 역사적 함의를 발견하게 된다.
인민군 점령기 3개월 동안 공산체제는 인민재판과 토지개혁, 인민군 징집 과정에서 타협 없는 교조적이고 잔혹한 ‘엄격함(Rigor)’을 행사했다. 조금이라도 계급적 성향이 다르거나 협조하지 않는 자는 반동으로 몰려 가차 없이 처단되었다.
반면, 1950년 10월 이후 익산지역을 수복한 대한민국 당국(경찰과 치안대)의 부역자 처리 과정에서는 또 다른 면모가 확인된다. 비록 초기 혼란 속에서 치안대의 사적 보복이나 가혹한 조사가 존재했을지라도, 이 25점의 사료군이 실증하듯 대한민국 치안당국은 적어도 자수(自首)의 기회를 보장하고, ‘마을 주민 3인의 신원 보증’과 ‘연명 탄원’이라는 향촌사회의 자율적 중재 시스템을 수용했다.
즉, "생명을 보전하기 위해 강요당했다", "무지하여 속았다"는 촌부들의 항변을 완전히 묵살하고 즉결 처분하기보다는, 이웃 3명의 보증을 담보로 그들을 다시 대한민국의 합법적 국민으로 품어 안는 '제도적 관용(Tolerance)'을 베풀었던 것이다. 김교남의 경우 1950년 가을에 자수한 후 이듬해인 1951년 2월에 정식 보증서를 갖추어 최종 면죄를 받은 사실은, 당국이 일정한 절차적 심사와 관용을 통해 이들을 체제 내로 재흡수하려 했음을 방증한다.
좌파의 서슬 퍼런 이념적 엄격함에 비해, 전세를 되찾은 우파정권과 향촌사회가 보여준 이러한 '조건부 관용과 포용'은 전란으로 갈가리 찢길 뻔했던 지역 공동체를 복원하고 수많은 민초의 목숨을 사지에서 건져낸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결국 이 25점의 문서는 단순한 '부역의 증거'가 아니다. 그것은 이념의 횡포 앞에 내던져졌던 평범한 농민들의 처절한 비망록이자, 이웃의 연대와 체제의 관용이 결합하여 끝내 생명을 지켜낸 '상생(相生)과 화해의 귀중한 역사 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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