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들어가는 말 - 1941년, 활자화되지 못한 청춘의 절규와 모국어의 성채
1941년은 일제의 민족말살정책과 전시 총동원 체제가 극에 달해 한국어 신문·잡지가 폐간되고 우리말 창작 자체가 질식당하던 한국 문학사의 가장 어두운 심연이었다. 대다수 기성 문인이 절필하거나 친일 협력으로 전락하던 이때, 제도권 문단 어디에도 공식 이름을 올리지 못한 채 병마와 고독 속에서 오롯이 모국어로 시집 한 권을 직조해 낸 청년 시인이 있었다. 스스로를 '길가의 평범한 돌'이라 낮추어 부른 시인 로암(路岩)과 그의 육필시집 [범석 凡石]이다.
자서(自序)에서 "나는 병들은 청춘이다"라고 고백하며 시작했던 시인은, 권말 후기(後記)에 이르러 "상당한 호전을 보기까지는 시작을 그만두겠다"며 펜을 내려놓는다.
이 책은 단순한 시작 메모나 단편적 육필원고가 아니다. 표지 제자(題字)부터 2면에 걸친 자서, 체계적인 목차, 시인의 손으로 그린 세밀한 풍경 펜화 삽화, 본문 82쪽에 걸친 정갈한 정서(淨書), 그리고 창작의 종언을 고하는 권말 '후기(後記)'에 이르기까지 정식 상업 출판 시집의 물리적·조판적 체제를 완벽하게 구현한 ‘사가(私家) 완성형 더미북(Dummy Book)’이다.
조선어 말살의 광풍 속에서 꺼져가는 생명의 마지막 불꽃으로 모국어 시를 벼려낸 이 육필본은, 한국 근대문학사의 공백을 메우는 더없이 처절하고 숭고한 원천 사료이다.
Ⅱ. 서지학적·문학사적 가치
(1) 출판 형식을 완벽히 갖춘 자필 정서본(더미북)의 체제와 완결성
① 서지 형태 - 19×13.2cm의 단행본 판형, 총 84쪽 완책. 보라색 괘선과 네 모퉁이의 화초 문양이 인쇄된 고급 200자 원고지(반책 접지)에 만년필 묵서로 전 편을 정서하였다.
② 전후 완결 구조 - 겉표지([凡石 路岩 著]) → 자서(自序, 2쪽) → 목차(目次, 2쪽) → 본문 시편(1~82쪽) → 후기(後記, 83~84쪽)로 이어지는 구성은 당대 문장사나 인문사 등에서 발간되던 일류 근대시집의 장정 및 편집형식을 정확하게 따르고 있다.
③ 풍경 삽화(커트)의 수록 - 10쪽 [만추(晚秋)], 27쪽 [한수(漢水)], 43쪽 [야(夜)의 연(戀)] 뒤편 등에 시인이 직접 펜으로 그린 다리, 강변, 험준한 산세 등의 삽화가 수록되어 있어, 단순한 원고 묶음을 넘어 '시각적 완성도를 지닌 시집'을 지향했음을 보여준다. ④ 정확한 제작 연대(1941년 봄~하지)
가) 자서(自序) 말미 : "二六〇一, 春令(1941년 봄)" 나) 후기(後記) 말미 : "二六〇一 年 夏至 路岩 記(1941년 하지, 로암 기)"
황기 2601년은 서력 1941년에 해당한다. 시인은 1941년 봄에 시집 편찬을 시작하여 당해 하지(6월 하순)에 전 84쪽의 시집을 탈고하고 자신의 시적 생애를 일단락 지었다.
(2) 후기(後記)의 발굴 - 질병의 고통과 시적 파벌(罷筆)의 선언
83~84쪽에 걸쳐 적힌 후기는 시인이 왜 이토록 처절하게 한 권의 시집을 묶어내야 했는지를 밝히는 핵심 기록이다.
"…… 이 졸열(拙劣) 무기(無技)한 시 내게는 너무나 귀엽고 잊을 수 없다. 곧 오늘날 나의 현대(現代)인 것이다. (82~83쪽) 나의 시는 이 범석(凡石) 하나로서 끝나고 또한 그것은 인연(因緣)인지 나의 조흔(좋은) 기념일 것이다. 또 하나의 비기(秘記)하여 이 책(冊) 중에 담어두기로 하자. (83쪽) 상당(相當)한 호전(好轉)을 보기까지는 시작(詩作)을 그만두겠다. 엇지 반드시 건강을 회복한다꼬(고) 호언(豪言)할 수 있으랴. 다행이 신명(神明)의 도움으로 회생한다면 병든 이때의 조흔 기념이 될 것이요, 만일 불행한다면 짧은 나의 일생(一生)의 기념이 될 줄 안다. 꼭 한 가지, 단 한 가지의 염(願)이외다. 하나님 다시 한 번 건강을 베푸소서.二六〇一 年 夏至 路岩 記 (84쪽)".
시인은 이 책이 살아서 회복될 경우 투병의 징표가 되고, 만약 죽는다면 "짧은 일생의 마지막 유품(기념)"이 될 것임을 예견하고 있었다. 문단 데뷔나 명예가 아닌, 사형선고와 같았던 질병 앞에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신(하나님) 앞에 생명을 구원받고자 했던 처절한 기도가 오롯이 박혀 있다.
(3) 수록 시편의 문학적 층위 - 우국(憂國)의 영사(詠史)와 병적 낭만주의
① 망국과 전란의 공간화
[왕검성 지의 봄](36쪽), [탄금대](37쪽), [평양성](38쪽), [목단향](51쪽) 등으로 이어지는 역사적 시편들은 고조선부터 고구려·백제에 이르는 비극적 패망의 현장을 소환한다. 창씨개명과 조선어 금지가 자행되던 1941년에 조국의 옛 도읍과 을지문덕 등의 영웅을 모국어로 노래한 것은 망국의 비애를 역사적 알레고리로 치환한 은밀한 저항이다.
② 모성과 귀향, 그리고 새벽의 갈망
[새벽](56쪽)의 "가슴이 뛴다. 피가 끓는다", [설은 환향](58쪽)의 "피 묻은 가슴에 눈물 흘리며 / 말없이 젖는 아들의 뒤를 좇아갈 때", 그리고 후반부 [어머니](78~81쪽) 연작에 나타나는 모성에의 회귀는, 병든 신체의 고통을 민족의 상흔과 결합하여 1940년대 초반 한국어 서정시가 도달했던 독특한 비장미를 구축하고 있다.
Ⅲ. 마무리 - 시대의 암운(暗雲)을 뚫고 살아남은 청년의 순결한 시비(詩碑)
시집 [범석 凡石]은 활자의 세례를 받지 못한 채 역사의 그늘 속에 묻혀 있던 '단 한 권의 온전한 육필 단행본'이다.
1941년 여름, 병마로 꺾여가던 무명의 청년 로암은 "하나님 다시 한 번 건강을 베푸소서"라는 간절한 기도를 마지막으로 펜을 놓았다. 그가 남긴 84쪽의 정갈한 필적 속에는 식민지 말기 우리말이 처했던 위기, 역사와 산하를 향한 묵직한 응시, 그리고 죽음의 문턱에서도 기어이 자신의 실존을 증명하려 했던 청년 문사의 결벽한 영혼이 숨 쉬고 있다.
정전(正典)과 기성 문단 중심으로 서술되어 온 한국 근대 문학사의 지평 뒤편에 이처럼 처절하고 완성도 높은 '숨은 시인'과 '숨은 책'이 실존했음을 증명하는 귀중한 서지학적 발굴 성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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