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품설명

현재 표지까지 온전한 모습의 국내 유일본이다.

 

1. 자료 개요 및 발행 배경

일제는 1905년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후, 간도지역 한인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1907년 통감부 임시간도파출소를 설치했다. 본 사진첩은 일제가 간도 영유권을 둘러싸고 청나라와 협상(1909년 간도협약)을 벌이던 시기를 전후해, 간도파출소 총무과장 시노다 지사쿠(篠田治策) 등이 지역 조사목적으로 촬영·수집한 사진들을 묶어 공식 보고서([통감부임시간도파출소기요] 등)의 부록 형태로 발행한 것이다.

 

주요 내용

제국주의적 시선에서 간도 지역을 체계적으로 기록한 최초의 사진첩이다. 간도 영유권의 핵심증거인 백두산정계비의 1907년 당시 실물사진이 수록되어 있다. 간도로 이주한 한인 농가들의 고단한 삶,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세워진 한인 서숙(서당)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특히 민족교육의 요람이었던 서전서숙을 찍은 거의 유일한 사진이 포함되어 학술적 가치가 매우 높다. 일제의 침략 기지로 용정촌에 들어선 간도파출소 청사 및 일제의 간도 침략을 위한 인프라 구축 현장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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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도 통감부임시간도파출소 청사-1908년 10월 준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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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도 간도자혜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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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도 통감부파출소 최초의 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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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도 파출소 설치 당시의 임시 사무소와 사이토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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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도 급조한 임시 청사의 건축(1907년 9월 기공, 10월 준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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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도 파출소 옛 청사>

 

 

2. 소장처 및 원본 자료

기밀 보고서의 부속 증빙물(비매품)이었기 때문에 소량 제작되어 전 세계적으로 소수의 기관에만 분산 소장되어 있다.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1984년 서지학자 이종학 선생이 서울대 도서관에서 [통감부임시간도파출소기요] 원본과 이에 부속된 형태의 사진첩 자료를 발굴한 바 있다. 표지 유실·복사), 미국 컬럼비아대학교 도서관에는 완벽한 형태의 원본 사진첩을 소장(표지 온전)하고 있으며, 국내 연구진이 이 도서관의 협조를 받아 영인본을 발굴·소개하기도 했다. 도쿄대 역시 당시 통감부 보고서와 연계된 형태의 [간도사진첩] 원본을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된다.

 

국내 보급(영인본) 판으로 일반 연구자와 대중이 접근하기 쉽도록 - 컬럼비아대학교 도서관본을 저본 삼아 - 사학자 박환 교수 등이 엮어 민속원에서 [간도 사진첩 - 만주, 제국주의 시선과의 첫 만남](2016년)의 제목으로 영인 해제본이 출판되어 있다.

 

○ "이 사진첩이 간도협약(1909) 및 영유권 논쟁에 미친 구체적인 영향"

 

통감부임시간도출장소가 발행한 [간도사진첩(1909)]은 단순한 풍경 사진집이 아니라, 일제가 간도 영유권 논쟁을 주도하고 최종적으로 청나라와 ‘간도협약(1909년 9월 4일)’을 체결하기 위해 정밀하게 기획한 ‘외교적·시각적 증거물’이었다. 이 사진첩과 관련 조사 자료들이 간도협약 및 영유권 논쟁에 미친 구체적인 영향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1) 백두산 정계비와 국경선의 ‘시각적 왜곡과 확정’

간도 영유권 논쟁의 핵심은 1712년 세워진 백두산 정계비의 문구(“동위토문(東爲土門)”, 동쪽은 토문강을 경계로 한다) 해석이었다.

일제는 1907~1908년 파출소 인력(오소네 세이지 등)을 동원해 백두산 정계비와 그 주변 물줄기(석퇴, 토퇴 등 경계 표시물)를 정밀 촬영했다.

일제는 사진과 지형 조사를 바탕으로 정계비 하류의 물줄기가 송화강(한국 측 주장)이 아닌 두만강의 지류인 홍토수(석을수)로 이어진다는 논리를 정립했다. 사진첩은 청나라와의 국경 회담에서 “과학적·시각적 조사 결과, 간도는 지리적으로 두만강 이북(청나라 영토)에 속한다”라는 일제의 결론을 정당화하는 시각자료로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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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5도 백두산정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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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51도 백두산정계비 소재지에서 오타 기사 일행>

 

 

(2) 간도협약(일·청 협상)의 압박 카드로 활용

일제는 처음부터 대한제국을 위해 간도를 지키려 했던 것이 아니라, 만주 진출을 위한 이권 교환의 카드로 간도를 활용했다.

① “간도는 한국 땅”이라는 초기 압박 - 일제는 사진첩과 보고서를 통해 “이렇게 많은 한인이 살고 있고(서전서숙 등 한인 사회 사진), 역사적 경계도 모호하므로 간도는 한국 영토(일제 통감부 관할)에 가깝다”라며 청나라를 강하게 압박했다.

② 철도·광산 이권과의 맞교환 - 청나라가 위기감을 느끼자, 일제는 본 사진첩 등으로 다져놓은 영유권 주장 지분을 포기하는 대가로 남만주 철도(안봉선) 부설권과 푸순 탄광 채굴권을 통째로 얻어냈다. 즉, 사진첩은 청나라로부터 최대한의 만주 이권을 뜯어내기 위한 ‘몸값 올리기용’ 증거 수집 책자였다.

 

(3) 대한제국 관할권의 철저한 배제 및 지우기

사진첩은 간도 지역이 대한제국의 행정력(과거 이범윤의 간도관리사 활동 등) 대신 일제 통감부 파출소의 경찰력과 통제 하에 있음을 대내외에 과시하는 역할을 했다. 일제는 이 사진 기록들을 바탕으로 청나라와 단독 교섭을 진행했고, 결국 영토의 진짜 주인인 대한제국을 철저히 배제한 채 간도협약을 타결했다. 이는 훗날 한국 학계와 국제법학계가 “외교권을 박탈당한 상태(을사늑약)에서 제3국들끼리 맺은 간도협약은 원천 무효”라고 주장하는 결정적 배경이 된다.

 

(4) 현대 영유권 논쟁(한·중 국경 문제)에 남긴 불씨

이 사진첩에 수록된 백두산 정계비의 원형 사진과 당시 지형 기록은 오늘날까지도 한·중 간 영토 논쟁의 고증 자료로 인용된다. 중국 측(동북공정)은 간도협약 서류와 당시 통감부의 조사 사진(두만강 국경 표시)을 근거로 “이미 1909년에 국제 조약과 과학적 조사를 통해 국경이 확정되었다”라며 간도 영유권 주장을 원천 차단하는 방어막으로 쓴다. 한국 학계는 반대로 이 사진첩이 일제의 침략적 의도와 만주 이권 침탈 과정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왜곡된 제국주의 시선의 산물임을 증명하는 역발상 연구 자료로 활용하고 있다. 요약하자면, [간도사진첩]은 일제가 한국의 영토 의식을 기반으로 청나라를 압박해 자신들의 만주 철도 이권을 챙긴 후, 간도를 청나라에 합법적으로 넘겨주기 위해 만든 '양날의 검'과 같은 역사적 기록물이다.

 

○ 백두산 정계비 주변의 국경 표시(석퇴·토퇴) 논쟁의 실체와 간도협약 직후 한인 사회의 법적·사회적 격변

 

(1) 백두산 정계비와 석퇴·토퇴(石堆·土堆) 논쟁의 실체1712년 정계비 건립 당시, 조선과 청나라는 정계비가 위치한 곳에서부터 동쪽 물줄기가 끊기는 지점까지 돌을 쌓거나(석퇴) 흙을 돋워(토퇴) 인공적인 경계 표시를 만들었다. [간도사진첩]에는 일제가 이 흔적들을 정밀 추적해 촬영한 사진들이 포함되어 있으며, 이는 양국의 논쟁을 완전히 뒤바꿔 놓았다.

 

조선 측은 정계비 동쪽의 '토문강'이 송화강 동쪽 지류라고 주장했다. 반면 청나라는 두만강 상류인 '홍토수'라고 맞섰다. 문제는 정계비 바로 아래에서 물줄기가 지하로 스며들어 땅 위에서는 끊긴다는 점이었다. 일제 파출소의 현지 조작과 발굴 - 통감부 간도파출소의 시노다 지사쿠 등은 현지 조사에서 흙과 풀에 묻혀 있던 석퇴와 토퇴의 흔적을 찾아냈다. 이 인공 경계선들이 최종적으로 연결되는 곳이 바로 두만강 상류인 홍토수(석을수) 방향임을 사진과 도면으로 증명했다. 이 사진 기록들은 당시 대한제국 정부가 주장하던 '송화강 경계론'의 지리적 약점을 일제가 파고드는 결정적 무기가 되었다. 즉, 일제는 학술적·물리적 고증을 완료해 청나라를 코너에 몰아넣은 뒤, "우리가 너희에게 유리한 증거(두만강 국경론)를 인정해 줄 테니 만주 철도권을 달라"고 딜을 제안한 것이다.

 

(2) 간도협약 직후 간도 한인들의 법적·사회적 격변(귀화와 재판권 문제)

간도협약은 영토의 획정뿐만 아니라, 그 땅에 살고 있던 연간 수십 만 명에 달하는 한인들의 삶을 송두리째 바꾼 비극의 시작이었다. 조약 제4조~제7조에 규정된 내용이 핵심이다.

- 청나라 재판권 인정 (제4조) : 협약 이전까지 간도 한인들은 대한제국의 관리(이범윤 등)나 일제 파출소의 보호를 받으며 청나라의 사법권을 거부했다. 그러나 협약 이후 한인에 대한 재판권이 청나라 관청으로 전면 이양되었다. 일제 선교사나 경찰이 참관할 수 있다는 단서가 있었지만, 실제로는 청나라 관리들의 가혹한 수탈과 차별적 재판에 무방비로 노출되었다.

- 토지 소유권과 ‘강제 귀화’의 딜레마 (제5조) : 청나라는 한인들에게 토지 소유를 허용하는 대신, 청나라 국적을 취득(귀화)하고 청나라의 법률과 세금을 따를 것을 강요했다. 법적으로 대한제국(한국) 신민이었던 한인들은 국적을 지키면 땅을 뺏기고, 땅을 지키려면 조국을 버려야 하는 극단적인 선택에 직면했다. 이는 훗날 만주 지역에서 '중국 국적을 가진 조선족'이라는 독특한 디아스포라 공동체가 형성되는 법적 출발점이 된다.

- 일제의 이중 플레이와 독립운동 탄압 : 일제는 간도를 청에 넘겨주었음에도, 한인들에 대한 호적 조사(통적부 작성)를 계속하며 이들을 '일본 제국의 잠재적 신민'으로 묶어두려 했다. 청나라의 관할권을 인정하면서도, 간도 내에서 성장하던 한인 민족학교(서전서숙, 명동숙 등)와 의병 기반을 감시·탄압하기 위한 정보망으로 사진첩과 호적자료를 계속 활용했다.

 

○ 북간도 최초의 근대식 민족주의 교육기관이었던 서전서숙(瑞甸書塾, 1906~1907)

서전서숙이 일제의 탄압으로 폐쇄되는 과정은, 일제가 간도 지역의 한인들을 제국주의 체제 안으로 편입하기 위해 감행한 정보 수집과 회유, 군사적 압박이 결합된 치밀한 말살 작전이었다.

서전서숙과 초기 민족학교들의 구체적인 폐쇄 및 와해 과정을 단계별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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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도 헤이그평화회의의 밀사 이상설李相占이 용정촌에 경영(설립)한 서전서숙理甸書塾>[1908년 9월 촬영]

 

※ 촬영일자(1908년 9월 촬영)에 대한 연구자의 이견
서전서숙(또는 서전의숙瑞甸義墊)은 이상설이 간도에 거주하는 한국인 자제의 교육을 위해 1906년 용정촌에 건립한 민족학교이다. 이상설이 1907년 4월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로 파견된 이후 재정난으로 학교 운영이 어려웠다. 더구나 파출소가 용정촌에 개설되면서 민족교육을 통제하고자 하는 압력으로, 일진회원 윤갑병尹甲炳에게 교사校舍를 매각하고 곧 폐교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 부지에 간도보통학교가 입지하여 다음 제 25도에서 보듯이, 1907년 7월 1일에는 개교식을 거행하였다. 그렇다면, 1908년 9월에 서전서숙의 현판을 단 이 사진의 촬영 일자는 오류라고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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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도 용정촌 전경(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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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도 용정촌 전경(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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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도 용정촌 전경(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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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설립자의 부재와 재정적 위기

서전서숙은 숙장(교장)인 이상설이 자신의 사재를 모두 털어 학생들에게 교재와 학용품을 완전 무상으로 공급하던 학교였다. 그러나 1907년 4월, 이상설이 고종의 밀명을 받고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참석차 블라디보스토크로 급히 떠나면서 학교는 중심축을 잃고 극심한 재정난에 직면하게 되었다.

 

(2) 일제 간도파출소의 밀착 감시와 정보수집의 표적이 된 서전서숙

1907년 8월, 일제는 용정촌에 조선통감부 간도파출소를 설치하고 일본 기병대와 헌병을 주둔시켰다. [간도사진첩]에 서전서숙의 사진이 실려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일제는 서전서숙을 '불온 사상의 온상'이자 '가장 위험한 민족주의 기지'로 규정하고, 청사와 학생들의 움직임을 사진으로 촬영하여 본국 통감부에 보고하는 등 철저한 감시망을 가동했다.

파출소 소장 사이토 스에지로(斎藤季次郎)와 총무과장 시노다 지사쿠 등은 헌병과 밀정을 동원해 서전서숙 교직원과 운영자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미행·사찰했다.

 

(3) 교묘한 회유책(매수공작)과 거부, 친일 교육으로의 전환 유도

일제는 무력 탄압에 앞서 학교를 경제적으로 예속시키려는 매수공작을 폈다. 간도파출소는 서전서숙 운영진에게 “매월 20원씩의 보조금을 지급하겠다”는 파격적인 제안을 건넸다. 만약 보조금을 받으면 일제가 요구하는 친일적 교육 방향과 교과과정을 수용해야 했다. 서전서숙의 남은 교사(여준, 정순만 등)들과 한인 사회는 영혼을 파는 일이라며 이 회유책을 완강히 거부했다.

 

(4) 고종 폐위 사건과 군사적 압박에 따른 1차 폐교 1907년 후반, 헤이그 밀사 사건의 여파로 고종 황제가 강제 폐위되었다는 소식이 간도에 전해지자 서전서숙 학생들과 교사들은 격분하여 거센 항일 여론을 형성했다. 위기감을 느낀 일제 간도파출소는 군사적 압박과 체포 위협을 노골화했다. 결국 서전서숙은 설립된 지 약 1년 만인 1907년 가을, 용정촌 내의 본래 서숙 건물을 닫고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5) 훈춘 탑자구로의 이동과 최종 와해

용정촌에서 쫓겨난 서전서숙의 일부 교원들과 학생들은 포기하지 않고 북간도 훈춘현 탑자구(塔子溝)로 자리를 옮겨 은밀하게 학교를 재건했다. 열악한 환경과 일제의 추적 속에서도 교사들은 끝까지 학업을 밀어붙여, 남아 있던 74명의 학생을 모두 졸업시키는 기적을 이뤄냈다. 그러나 이 마지막 졸업식을 끝으로 재정 고갈과 일제의 숨 막히는 탄압을 이기지 못하고 서전서숙은 역사 속으로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일제는 서전서숙을 폐쇄하는 데 성공했고, 이를 [간도사진첩]에 담아 "우리가 간도 내 불온 세력을 통제하고 근대화했다"는 홍보용 성과로 자랑했다. 

그러나 서전서숙의 폐교는 실패가 아니었다. 이곳에서 졸업한 74명의 청년과 교사들은 북간도 전역의 한인 부락으로 흩어져 명동학교(明東學校), 창동학교(昌東學校) 같은 수많은 후속 민족학교들을 건립하는 주역이 되었다. 일제가 꺾으려 했던 서전서숙의 불씨가 오히려 만주 전역의 항일 독립운동 기지 개척으로 확산하는 기폭제가 된 것이다.

 

○ 통감부 파출소의 '모범농원'과 간도 한인의 농업

[간도사진첩]에는 간도파출소가 청사 주변에 직접 조성·운영한 부속모범농원(附屬模範農園) 관련 사진이 다수 실려 있다. 파출소는 설치 직후인 1908년 청사 주변 6천여 평의 밭을 사들여 일본에서 과수와 묘목을 수입해 보통작물 재배를 시험했고, 1909년에는 온실과 방한실을 증설해 부속원 2천여 평에 종자모종원·특용작물원·보통작물원 등을 별도로 갖추었으며 한국 수원권업모범장의 수원업(授援業)을 본떠 병설하기도 했다. 화단 딸린 채소밭, 한지(寒地) 작물 시험 삼아 일본 종자로 재배한 배추밭 - 다만 1909년 토질 문제로 충분한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 사과·배·매화·앵두·자두·복숭아 등 과수와 포도·장미·포플러·오동 등 수묘류를 시험 재배한 과수묘포, 그리고 수원권업모범장에서 품종을 들여와 용정촌 동대교 부근 한인 소유 논 1단보를 빌려 벼농사를 시작한 수도(水稻) 재배 시험 등이 그것이다. 이는 일제가 간도 통치의 정당성을 "낙후된 변경에 근대 농법을 이식했다"는 식으로 포장하기 위해 남긴 관제 기록의 성격이 짙다.

 

 

○ 간도 한인의 농경과 생활상

같은 사진첩에는 관제 시범농원과 별개로, 간도로 이주한 한인들이 실제로 영위한 농경과 생활의 단면도 담겨 있다. 용정촌은 파출소 개설 당시 한인 90여 호, 청인 34호로 구성되어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했으며, 물자 유통을 위해 파출소가 매월 2·7일 개시(開市)하는 우마시장을 열어 일본 상인까지 참여하는 간도 제일의 성황을 이루었다. 한인들이 즐겨 재배한 담배농사는 남녀가 함께 흡연하며 담소를 나누는 생활문화와 맞물려 있었고, 논농사는 남강평야·무산간도 등을 중심으로 한인의 손으로 이루어졌으며, 보리·밀·귀리·조·고량·옥수수·감자 등 밭작물 경작과 타작, 물레방아·연자방아를 이용한 좁쌀 정미, 쟁기·부삽·써레 등 재래 농기구까지 이주 한인의 농경생활 전반이 사진으로 남아 있다. 아울러 정초 무렵 한인 부녀자들이 즐기던 널뛰기 풍속 역시 전통 농경사회의 세시풍속을 보여주는 자료로 함께 주목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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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3도 육도구 하천가의 무자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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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1도 부속모범농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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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2도 부속모범농원 화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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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3도 부속모범농원 배추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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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4도 부속모범농원 시험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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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5도 부속모범농원 과수묘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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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6도 부속모범농원의 수도 재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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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7도 부속모범농원에서 생산한 채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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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8도 한인의 농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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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1도 용정시 우마牛馬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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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3도 한인의 연초 재배(용정시 부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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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4도 한인의 연초 건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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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5도 등불사의 논농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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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6도 한인의 보리 타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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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7도 한인 부녀자의 조粟 정백精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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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3도 간도 서부에서 발굴된 원주민의 옛날 기구器具(농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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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34도 한인 부녀자의 놀이(널뛰기)>

 

○ 부록 : 신파리호족(新巴爾虎族) 사진 (소장자 수록)

책 말미 판권지 앞에는 원 사진첩 138장 체계와는 무관하게, 소장자가 개인적으로 추가한 몽골계 민족지 사진 1점이 붙어 있다. 원본 인화지를 오려 붙인 형태이며, "인쇄물 복제를 금한다(印畫の複製を禁ず)"는 문구가 딸린 일본어 설명문이 함께 있다. 설명에 따르면 신파리호족은 본래 외몽골 케룰렌강 및 후룬호 부근에서 유목하던 부족으로, 청 가경(嘉慶) 연간에 북방 흥안령 기슭에서 남방 진파이후(陳巴爾虎) 지역으로 이주하며 새 이름을 얻었다. 기혼 여성은 은제 부채꼴 큰 귀걸이와 큰 쪽머리를, 미혼 여성은 머리를 하나로 늘어뜨리는 것으로 구별했다고 한다. [간도사진첩] 자체의 구성물은 아니며, 만주 민족지 사진엽서류의 개별 수집품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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