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도 정주목(定州牧) 소속 관영 창고인 민칙고(民勅庫)에서 작성한 종합 물품·재산대장(重記)이다. 표제는 "道光八年十月日定州牧民勅庫重記"로 명확히 판독되며, '정주목'이라는 행정단위와 그 산하 '민칙고'라는 기관명이 결합된 정식 명칭이다. '칙고(勅庫)'는 명·청 사신인 칙사(勅使)의 왕래를 접대하기 위한 비용·물품을 마련·보관하던 특수 관영 창고를 가리키는데, 본 문서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창고가 ‘입국하는 중국 칙사 영접’뿐 아니라 ‘출국하는 조선 연행사(燕行使) 일행의 지참 물자 조달’까지 겸했음을 문서 내부의 구체적 기재로 실증한다는 점에서 각별한 사료적 의미를 지닌다.
문서 곳곳의 우산·휘장·병풍류 등 일부 물목 하단에 "赴燕持去"(부연지거, 연경(燕京)으로 갈 때 지참해 감)라는 구절이 반복 확인되는데, 이는 정주목 민칙고가 단지 통과하는 칙사를 접대하는 고정형 시설물뿐 아니라, 실제로 사행인원이 북경으로 떠날 때 휴대해 가는 이동용 물품까지 관리·지급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물증이다. 의주-한양을 잇는 사행로의 요충지이자 거읍(巨邑)이었던 정주가, 칙사가 오가는 길과 연행사가 오가는 길이 실제로는 하나의 같은 길이었다는 사실을 이 여섯 글자가 행정문서 차원에서 뒷받침하고 있는 셈이다.
문서 말미에는 본 중기(重記) 작성과 물품 실사에 참여한 도감(都監)·색리(色吏)·고자(庫子) 등 향리 및 실무진의 실명이 직책과 함께 명기되어 있어, 19세기 정주목 지방행정 체계를 복원하는 데에도 기여하는 자료이다.
상세 내용 및 구성
1. 건물秩 - 창고 시설 현황
문서 서두에는 민고(民庫)·고마고(雇馬庫, 瓦家 17間) 등 칙고 관련 건물들의 칸수(間數)와 위치가 명시되어 있다. 고마고 항목에는 ‘균역청(均役廳)’ 관련 저울·기구가 함께 기재되어 있어, 정주목의 칙수(勅需) 경비 일부가 균역청 재원과 연계·운용되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창고수리에 필요한 암키와(女瓦) 934정, 수키와(夫瓦) 123정, 파와(破瓦) 160정 등 기와 자재의 수량까지 낱낱이 파악해 등재하였으며, 땔감(柴丁) 810정 가운데 15정을 인근 ‘봉수(烽燧)’에 지급한 기록도 확인되어, 창고 운영이 봉수 체계와도 물자 차원에서 연계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2. 전답질(田畓秩)
칙고의 상시 운영과 재원조달을 위해 확보한 토지 내역이다. 아이포(阿耳浦)·칠리(七里)·둔전(屯田)·이언(伊彦)·대명동(大明洞)·신동(新垌)·서면삼리동자동(西面三里童子洞)·남면외도(南面外島)·고읍(古邑) 등 정주목 관내 각처에 산재한 토지의 위치, 파종량(日耕·石落), 매입(買入)·지급(出給)·방매(放賣)·파동(破洞) 등 거래·이력이 간지(干支) 연호와 함께 꼼꼼히 기록되어 있다. 매입 기록 가운데는 ‘경자(庚子)·신축(辛丑)’ 등 문서 작성연도(1828)로부터 역산했을 때 ‘정조(正祖)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판단되는 연호도 확인되어, 이 민칙고가 최소 정조~순조 초년부터 존속하며 누적 치부해 온 유서 깊은 기관임을 시사한다.
3. 잡물질(什物·器皿秩)
칙사 접대와 연향, 그리고 관아 업무에 쓰이던 생활 기물·가구·직물류가 총망라되어 있다.
- 좌구류 : 상석(上席)·중석(中席)·방석(方席)을 입(立) 단위로, 자주주단만화방석(紫紬緞滿花方席)·만화등매석(滿花登每席) 등 재질·문양을 구체 기재하였고, 특히 강화 교동도산 최상급 완초석인 ‘교동석(喬桐席)’이 여러 차례 등장하여 칙사·사행 영접용 고급 좌구를 실제로 구비하고 있었음을 뒷받침한다.
- 가구·병풍류 : 평상(平床)·고족상(高足床), 화병(畫屛)·침병(寢屛) 등.
- 등촉·문방구류 : 동촉로(銅燭爐)·현촉롱(懸燭籠)·죽촉롱(竹燭籠), 연석(硯石)·인합(印盒)·양산(兩傘) 등.
- 물목 대부분에 좌구·상·병풍·문방구를 아우르는 공통된 3음절 어구("王古沙" 계통, 이표기 다수)가 접두되어 있는데, 이는 칙수용으로 별도 구분·관리하던 물목을 표시하는 소분류 표지로 추정된다. 정확한 자의(字義)는 추후 분석을 통해 확정할 필요가 있다.
- 모든 물목에는 파손 여부(破不用)·현재 보유(時存)·신규 마련(新備) 여부가 병기되어 있어, 이 중기가 단순 목록이 아니라 자산 실사와 감가 관리 기능을 겸한 회계장부였음을 보여준다. 앞서 언급한 "赴燕持去" 표기는 바로 이 잡물질 항목의 우산·휘장·병풍류 일부에서 확인된다.
4. 관마질(官馬秩) 및 노비
사행로의 원활한 교통과 물자 수송을 위해 관리하던 관용 말들의 수량·상태가, 이빨 상태로 나이를 표시하는 치령(齒齡) 방식("臭裂禾八" 등)으로 개체별 기재되어 있다. 김성(金成)·강룡(康龍)·강재국(康才國)·백문성(白文成) 등 마필을 배정받아 관리하던 마감(馬監)·마부 또는 관노로 추정되는 인물들의 명단이 함께 수록되어 있다.
5. 여수질(與受秩)·문기류(文記類)
한성별비(韓姓別備)·이성별비(李姓別備) 등 성씨별 채권·채무 계정이 별도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대여(給債)·수봉(捧上)·이자(利子) 계산이 양(兩)·전(戔) 단위로 기재되어 있다. 이는 민칙고가 잉여자금을 대출·수봉하여 운영재원을 보충하던 식리(殖利) 활동의 실증 자료이다. 토지매매 이력을 뒷받침하는 문기(文記)의 장수(張數)도 함께 병기되어 있다.
6. 조사 실무진 기록
문서 말미에는 도감(都監) 홍락주(洪洛柱), 색리(色吏) 홍사현(洪師賢), 고자노(庫子奴) 시철(時哲), 오몽수(吳夢秀) 등 본 중기 작성과 물품 실사에 참여한 향리·실무진의 실명이 직책과 함께 적혀 있어, 당시 정주목의 지방 행정 체계를 복원하는 데 기여한다.
학술적 가치 및 의의
1. 사행로 양방향 지원 기능의 실물 증거
'赴燕持去' 기재는 정주목 민칙고가 입국하는 중국 칙사 접대와 출국하는 조선 연행사 지원을 한 기관이 함께 담당했음을 보여주는 드문 실물 회계자료이다. 통상 별개로 논의되는 '칙사영접'과 '연행지원' 업무가 실제로는 하나의 행정·재정 체계 안에서 통합 운영되었음을 구체적 물목 단위로 확인시켜 준다는 점에서, 조청(朝淸) 외교사·사행사 연구에 새로운 실증적 근거를 제공한다.
2. 지방 재정 운영의 다각적 실상
둔전 수입, 균역청 연계, 식리(대출이자), 봉수 물자 지급까지 단일 민칙고가 복수의 재원과 지출 경로를 결합 운용한 구조가 한 문서 안에 압축되어 있어, 19세기 전반 지방 재정사 연구에 특히 유용한 자료이다.
3. 물질 문화사 및 어휘사적 가치
당시 정주 지역에서 통용되던 기물·직물의 명칭, 재질, 규격이 대량으로 수록되어 있어 조선후기 어휘 연구와 물질문화 복원에 탁월한 가치를 지닌다.
4. 사료의 희귀성
전국적으로 '칙고(勅庫)' 관련 종합 장부인 '중기(重記)'가 이처럼 방대한 분량으로, 더욱이 칙사영접과 연행지원 겸용 기능이 문서 자체에서 확인되는 형태로 남아있는 예는 찾아보기 어렵다. 서지학적·역사적으로 매우 높은 가치를 지닌 자료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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